[고광일 기자]
▲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 영화 <헌트> 스틸컷 |
대통령의 이동 동선, 특수부대의 북한 침투 작전, 북한 고위급 인사의 망명 계획 등 일급 기밀이 줄줄이 유출되는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김정도(정우성)는 조직에 숨어든 스파이 ‘동림’에 대한 제보를 받고 색출 작전을 시작한다. 작전이 진행되며 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려둔 평호와 정도. 동림을 찾아내지 못하면 상대방에 의해 스파이로 몰리게 될 상황. 과연 두 사람은 사냥감이 될 것인가, 사냥꾼이 될 것인가.
▲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 영화 <헌트> 스틸컷 |
액션으로 확장하는 감정과 윤리적 고민
<헌트>는 친절한 영화다. 오프닝에서 역사와 허구의 조합이라는 방향을 명시한다. 1983년 워싱턴을 방문한 전두환의 마네킹을 불태우는 교민들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CIA 지부장은 안기부 요원에게 ‘신군부가 무력으로 광주를 진압했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라며 타박한다.
곧이어 전두환을 암살하려 한다는 첩보가 접수되고 요란한 총격전 끝에 암살범들이 사살된다. 짧은 오프닝 안에 전두환과 광주라는 역사. 워싱턴에서의 총격전이라는 픽션이 재빠르게 교차한다. 이후 <헌트>는 장영자의 금융사기, 이웅평 대위의 전투기 귀순, 아웅산 테러 사건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영화에 편입시키며 관객의 몰입감을 더한다.
허나 워싱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는 대담한 시도에서 알 수 있듯 <헌트>는 역사적 사실이 주는 현실감과 무게감을 감수하되 역사를 단순한 재현의 대상으로 보지 않겠다는 야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워싱턴과 도쿄에서의 비현실적인 총격전은 그 야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모티브가 되는 사건도 없을뿐더러 미국과 일본의 수도에서 난대 없는 총격전이냐는 현실적(?)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무엇보다 서사적으로도 역할이 미미하다.
▲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 영화 <헌트> 스틸컷 |
그러나 액션을 버리고 <헌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헌트>에서의 액션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선,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윤리적 딜레마와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동림의 정체가 발각되면 위험에 처할 인물.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는 걸 막아야 하는 인물을 떠올려봤을 때 워싱턴과 도쿄의 총격전은 두 주인공의 불안을 시각화한 것처럼 보인다.
방콕에서 벌어지는 세 번째 총격전은 시야를 더 확대한다. 각자의 신념을 위해 달려온 평호와 정도가 잠시 한배를 탄 것처럼, 평행선을 그리던 역사와 허구가 중첩되어 관객에게 <헌트>가 지닌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구간이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수동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워싱턴, 도쿄와 달리 능동적으로 폭력을 주도한 방콕에서 두 주인공의 입장이 변화하는 지점이다. 동시에 대의를 위해 행동한다고는 하지만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안기부 소속. 그것도 차장이라는 고위직인 두 주인공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동의할지 아닐지 최후의 선택을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 영화 <헌트> 스틸컷 |
이정재 감독이 받아들인 예정된 패배
<헌트>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녀석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이다. 제대로 된 심판을 받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독재자에 대한 원한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탓에 방콕 총격전에서는 타란티노의 작품처럼 대체 역사의 쾌감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정재 감독은 과감히 예정된 패배를 받아들인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지만, 그 결과는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의 상처였다. 영화상에서 제공된 정보로 판단하자면 정도나 평호의 원래 계획이 실행됐어도 남는 건 북한의 적화통일 또는 군부가 중심이 된 새로운 신군부의 출현이라는 미래뿐이다.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는 선택지를 위해 승리를 바랄 순 없다. 실제로 한국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또 다른 김재규를 새겨넣는 대신 직선제라는 성취를 얻어냈지 않은가.
모든 사건이 종료된 후. 평호는 남해의 절간으로 피신한 조유정을 찾아가 새로운 여권을 건네며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설득한다. 일찍이 평호에게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멍청하다’라며 ‘독재자보다 독재자 밑에서 일하는 게 더 나쁘다’라고 했던 유정은 과거와 선을 긋고 다르게 살기로 결심한다.
평호와 정도가 꿈꾸지 못한 그곳은 안기부도 없고 주체사상도 없는 새로운 세상이다. 어쩌면 혁명은 진보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마지노선을 긋는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