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버무린 16가지 나물, 한우구이와 환상 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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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sar99



맛따라기

한우구이만큼 인기 있는 다양한 나물 반찬이 곁들여진 ‘한우 특수부위 모둠’ 상차림. 신인섭 기자

알고 지낸 지 20년째인데 여주인 입맛 참 까다롭다. 한때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지방 여행을 몇 차례 함께했다. 음식을 흔쾌히 칭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음식점 시작한 지 25년째다. 1997년 서울 대치동에 연 고깃집 ‘옛골’이 처음이다. 중간에 4~5년 쉬었지만, 식자재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재료 잘 다루는 음식점 가 보고, 음식 선생님들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그 세월,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고치지 못하는 습관 또는 집착인지도 모른다. 시장은 직접 봐야 하고, 마음에 들면 가격 따지지 않고 사며, 10년 함께 일한 찬모가 있지만 반찬은 직접 한다. 또 눈에 띄는 식자재는 입으로 먼저 맛본다.

좋은 식자재 찾아다니다 혀 마비도

장영순 사장. 신인섭 기자

가업을 잇겠다고 4년을 배우던 아들은 어머니 일과와 사계절 하는 일을 지켜보더니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다’며 자기 일을 찾아 떠났다. 새벽에 시장 봐서 하루 20여 가지 반찬 만들고, 때 되면 장 담그고, 나물 삶아 저장하거나 장아찌 담그고 하면서 날마다 손님 맞아야 하는 일들을 요즘 젊은이가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명품리 양자산(710.2m) 중턱의 ‘마당 넓은 집’ 여주인 장영순(65)씨 얘기다. 행정구역은 여주지만 양평이나 곤지암이 가까운 이 집은 이름처럼 마당이 넓다. 대지 2645㎡(800평)에 마당이 2000㎡(605평)쯤 된다.

1++(속칭 투뿔) 등급 한우구이가 주력인 고깃집이지만, 사람들은 나물이 맛있는 집으로 좋아하고 기억한다. 제철 나물 또는 제철에 갈무리한 나물들을 독특하고 맛있게 요리하기 때문이다. 곤지암역 근처에서 14년 넘게 성업하다가 지난 9월 5일 살림집 옆으로 사업장을 옮겼다. 양평~곤지암 98번 지방도 주변의 일곱 개 골프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요긴한 뒤풀이 장소였다.

이사 소식을 듣고 지난달 두 차례 찾아갔다. 지난달 26일 갔을 때 한우 특수부위 모둠(1인 150g 5만9000원) 상차림은 단호박죽을 시작으로 반찬 16가지, 나물비빔주먹밥, 된장찌개(또는 청국장찌개), 후식(매실차나 생강차)으로 이어졌다. 나물 일색의 반찬은 다음과 같다.

나물 반찬을 넣고 손으로 비빈 뒤 만든 나물비빔주먹밥. 신인섭 기자

①데친 미나리나물 ②생굴·김칫소 곁들인 배추쌈 ③데친 들깨 순 무침 ④오이소박이 ⑤생미나리(숯불에 살짝 구워 고기에 곁들임) ⑥아삭이고추소박이 ⑦애호박고지나물(생물 애호박 색을 살려 고들고들하게 직접 말림) ⑧으깬 두부로 무친 톳나물 ⑨건새우 꽈리고추볶음 ⑩울릉도 눈개승마 묵나물 무침 ⑪땅두릅 묵나물 무침(가닥을 일일이 갈라 반건조한 뒤 살짝 얼려서 보관) ⑫세발나물 무침 ⑬찐 가지 무침 ⑭어수리 어린 순 묵나물 무침 ⑮자연산 더덕장아찌(고추장은 훑어내고 헹궈 가늘게 찢은 다음 참기름·참깨로 무침) ·물골안 취(시장에선 물고랑 취라 함) 묵나물 무침.

조선무로 만든 무김치. 신인섭 기자

여주인은 긴장해서 한 가지 빠트렸다며 더 내왔다. 10년 묵은 뿌리에서 나온 울릉도 자연산 명이(산마늘) 새싹 장아찌다. 잎이 넓고 두꺼우면서 줄기는 굵다. 웃자란 듯 크지만 씹어 보니 연하다. 다년생인 명이는 나이가 들어야 잎줄기가 굵게 올라온다. 이어서 내년 6월 상에 내려고 담갔다는 무김치를 내왔다. 총각무와 다르게 질감이 단단하면서 쫄깃쫄깃하다. 누군가 조선무를 재배한다고 해서 시험 삼아 사들여 김치를 담가 봤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좋은 식자재를 하나씩 찾아간다.

몸에 밴 탐구심 때문에 위험했던 적도 있다. 색다른 식자재를 보면 씹어서 맛을 봐야 풀리는 직성 탓이다. 언젠가 이른 봄에 강원도 화천 비수구미에 갔는데 울릉도 전호나물과 똑같이 생긴 풀이 있었다. 봄에 가장 먼저 나오고, 해마다 울릉도에서 받아 손님상에 내는 나물이다. “어머 여기도 전호가 자라네” 하면서 한 가닥 뜯어 냄새 맡아 보니 전호와 같았다. 바로 입에 넣고 씹었다. 혀에 마비가 왔다. 2시간 넘어서야 서서히 풀렸다. 그러고도 씹어 보는 버릇은 못 고쳤다.

울릉도 자연산 명이(산마늘) 새싹 장아찌. 신인섭 기자

고깃집이 이토록 나물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뭘까. 여주인은 들뜬 표정으로 설명했다.

“고기만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해서 그걸 상쇄 또는 보완하는 반찬을 찾다가 나물을 선택했다. 잘하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이뤘다. 처음엔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법의 조미료도 쓰고 양념도 세게 했다. 맛있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내 마음에는 안 들었다. 이유가 궁금해 잘한다는 집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힌트는 얻었지만, 답은 못 찾았다. 결국 경험에서 답을 찾았다. 음식은 스승이 따로 없고 스스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걸 그렇게 터득했다. 그때 가는 곳마다 음식 맛없다 타박한 게 얼마나 염치없는 말이었는지 이제 알겠다.”

나물은 볶지 않고 모두 무친다. 볶으면 기름이 나물 맛을 가릴까 봐 들기름, 들깻가루, 복합 육수, 조선간장 조금씩 넣고 주물러 무치는 것이다. 된장·고추장이나 파·마늘은 안 쓴다. 순수한 나물 맛을 살리려고 양념을 단순하게 한다. 무친 나물 위에 다진 파나 마늘을 조금씩 올리는 건 고명이다. 이 일을 남에게 맡기면 불안해서 직접 한다. 팔자라면 팔자이겠다.

손님들은 이런 음식을 믿어 주고, 옛날 맛이라거나 엄마가 해 주던 맛이라고 칭찬한다. 그 바람에 손을 놓지 못한다. 한두 가지 빠지면 ‘그때 그거 안 주냐’며 찾기도 해 가짓수를 줄일 수도 없다. 손님이 좋아하니 신나서 더 하게 되고, 하다 보니 탐나는 나물이 자꾸 보여서 종류가 늘었다. “이런 나물 우리 집 아니면 어디서 드실 수 있겠어요”라며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길을 가다가도 눈에 드는 나물이 있으면 돈 생각 안 하고 산다.

창가 식탁서 보이는 풍광도 빼어나

‘마당 넓은 집’ 옥상에서 바라본 풍광. 신인섭 기자

그렇게 정성 들인 나물이 상에서 남으면 아까워서 버릴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생각한 게 나물비빔주먹밥이다. 상에 남은 나물을 양푼에 모아 가위로 잘게 자르고 밥과 볶은 메밀쌀, 저민 아몬드에 묵은 간장 조금 넣고 손으로 조물조물 비벼 뭉친 다음 손바닥에 올리고 통통 튕기면 골프공처럼 동그란 모양이 나온다. 여러 가지 도구로 해 봤지만 다섯 손가락을 다 써서 손으로 구석구석 비비는 게 가장 맛있었다. 버리게 된 나물 되살려 활용한 주먹밥이 이 집 명물이 됐다.

고기는 한우 ‘투뿔’ 가운데서도 강원·경상도 고기를 주로 쓴다. “씹는 맛이 있는 투뿔을 찾는데, 전라·충청도 소고기는 먹어보니 육질이 무르고 맛이 싱거워 안 쓴다” 했다. 지난달 초에 갔을 때는 양념갈비를 굽다가 슬쩍 맛을 보더니, 직원 불러서 “이 고기 다 빼라”고 지시했다. 담백한 어조였지만 느낌은 불호령이었다. 손님은 몰랐는데, 매실액을 잘못 넣어서 신맛이 있다고 했다. 본인의 미각 기준과 음식 철학에 따라 이토록 엄격하게 관리하는 음식은 절밥을 연상시킨다. 맛이 순하고 차분하며, 먹으면 입과 속이 편안하다.

창가로만 배치한 식탁에 앉아서 보는 풍광은 덤이다. 주산-안산-좌청룡-우백호가 뚜렷하고 균형 잡힌 골짜기 안의 마을 맨 위에 자리 잡아 전망이 그만이다. 누가 봐도 아늑한 명당이다.

차 없이는 가기 어렵다. 버스정류장에서 2.2㎞ 걸어 올라가야 있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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