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기자]
▲ MBC 드라마 <연인>의 한 장면 |
ⓒ MBC |
MBC 사극 <연인>은 병자호란뿐 아니라 그 이후의 참상도 보여준다. 패전 뒤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노예 노동에 동원되는 참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도주를 시도하는 조선인들을 잡으려 청나라 공주가 말을 타고 다니며 인간 사냥을 하는 등의 과장된 장면도 있지만, 이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타국 땅을 전전한 사람들의 고통이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승전국이 상대국 백성을 탐하는 모습은 왕조시대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고대로 가면 갈수록 국가들은 1, 2년이 멀다 하고 전쟁을 벌였다. 그렇게 자주 벌인 것은 재정 수입을 위해서였다. 군주 간의 원한이나 국제패권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풍흉에 따라 불규칙해지는 조세 수입의 균형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경우의 전쟁은 조세 수입의 원천인 농민과 농토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에 주된 목적이 있었다. 농민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상대방 농민을 빼앗고, 새로운 농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상대방 영토를 빼앗고자 전쟁을 일으켰다. 농민이 필요해서 전쟁을 벌인 경우에는 상대국 영토를 점령한 뒤 농민만 빼내 철수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정부들이 외국 노동력이나 해외자본 유치에 신경 쓰는 모습은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유사하다. 노동력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관한 규칙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렇게 전쟁을 통해 노동력 및 토지 수요를 해결하는 일들이 잦았다.
▲ MBC 드라마 <연인>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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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42년에 백제 의자왕은 신라와의 전쟁에 직접 나서 불과 1개월 만에 40여 개의 성을 점령했다. 그런 다음, 장군 윤충을 시켜 지금의 경남 합천과 부분적으로 겹치는 신라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대야성 점령 뒤 의자왕은 현지인 1천여 명을 백제 수도인 사비성 서쪽으로 옮겨놓았다. 주로 농민인 대야성 주민 1천여 명을 지금의 충남 부여 서쪽에 배치했던 것이다. 대야성 전투가 사비성 서쪽의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는 데 활용된 셈이다.
노동력에 눈독을 들이는 그런 모습이 병자호란 때는 매우 심각하게 나타났다. 청나라가 빼앗아간 노동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병자호란이 전개된 1637년 1월에 이조판서였고 종전 직후에 우의정이 된 최명길이 전쟁 상황에 관해 명나라에 보낸 공문이 그의 문집인 <지천선생집(遲川先生集)>에 실려 있다 이 책 제17권에 담긴 이진도독자(移陳都督咨)란 외교문서에서 그는 “사로잡힌 사람이 무려 50여 만”이라고 밝혔다. 지금의 행정자치부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 직을 전쟁 중에 수행한 관료가 언급한 수치이니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로잡힌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은 피부인구(被俘人口)다. 옛날에는 ‘인구’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그리 좋지 않았다. 노비를 셀 때 1구(口), 2구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식으로 집계되는 사람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사람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주류가 농업 노동자나 수공업 노동자였기 때문에, 지배층의 입장인 최명길이 자연스럽게 그런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병자호란이 있었던 17세기 전반의 조선 인구는 1600만을 넘기 힘들었다. 7500만을 넘는 지금의 한반도 인구에 비해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이므로, ‘피부인구 50만’이 주는 느낌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명길이 말한 50만보다 훨씬 많은 수가 끌려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 상황을 서술한 <산성일기>에는 “훗날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만 해도 66만에다가 또 몽골에 떨구어진 자는 그 수에 넣지 않았으니 그 수가 많음을 가히 알 수 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산성일기>는 조선 지도부의 동태를 생생히 알려준다. 이는 이 책 저자가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감안하면, 청나라에 끌려간 숫자가 66만을 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으로부터 27년이 흐른 1664년 가을이었다.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한양에 전해졌다. 병자호란 때 만 12세 나이로 끌려갔던 39세 남성 안추원이 극적으로 도망쳐 의주에 와 있다는 뉴스였다.
이때는 병자호란 당시의 주상인 인조가 죽은 뒤였다. 인조도 죽고 그 아들 효종도 죽고, 손자인 현종이 임금일 때였다. 음력으로 현종 5년 8월 12일자(양력 1664년 10월 1일자) <현종실록>은 위 소식을 이렇게 전한다.
“피로인(被擄人) 안추원이 심양에서 도주해 돌아왔다. 추원은 경기 풍덕 사람이다. 병자년의 난 때 나이 13세였다.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가 몽골인에게 붙들려 심양으로 들어가고 한족 야장(冶匠)의 집에 팔렸다.”
‘피로’는 최명길의 공문에 언급된 ‘피부’와 같은 의미다. 그가 사로잡혀 피로인이 되는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강화도로 들어갔다. 만 12세였으니, 가족과 함께 들어갔을 것이다. 몽골의 고려 침입 때처럼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해 항거할 것이므로 강화도는 안전하리라고 예상하고 그쪽으로 피난간 것으로 보인다.
▲ MBC 드라마 <연인>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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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조는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강화도에서 안추원은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몽골인들에게 붙들렸다. 그 뒤 당시의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다가 한족 철공업자의 노비로 매매됐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흘러 1644년에 청나라가 북경(베이징)을 점령하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이 일은 안추원이 청나라의 이주령에 따라 북경으로 옮겨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기도 풍덕에서 강화도로, 여기서 북쪽 심양으로, 다시 서쪽 베이징으로 옮겨지게 됐던 것이다.
그가 도주를 단행한 것은 1662년이다. 북경으로 옮겨간 지 18년 뒤였다. 하지만 이때는 실패했다. 만리장성 동쪽 관문인 산해관(산하이관)을 넘치 못하고 붙들렸다. 이 때문에 북경으로 송환돼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자자형을 받았다. 그런 뒤인 1664년에 재차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 것이다. 위 실록에 ‘심양에서 왔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이때 심양 쪽에서 남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에 글자가 새겨진 채 귀환해 의주부에 구치된 안추원을 조선 조정은 조심스럽게 환영했다. 청나라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최고 기관인 비변사는 “내지로 이송해 옷과 음식을 주어 춥고 주리지 않게 하소서”라고 건의해 현종의 재가를 받았다.
그러나 안추원은 조선에 오래 있지 못했다. 현종 7년 1월 15일자(1666년 2월 18일자) <현종실록>은 그 추운 겨울에 그가 청나라로 돌아가고자 압록강을 넘은 직후에 체포됐다고 알려준다. “추원이 돌아와보니 부모형제는 모두 죽고 생활할 길도 없어 청국으로 돌아가다가” 붙들렸다고 <현종실록>은 말한다.
그리운 가족을 찾아 목숨을 걸고 27년 만에 귀환했지만, 가족은 모두 떠났고 생계도 막막했다. 그래서 또다시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섰다가 청나라 군인에게 붙들렸던 것이다. 4개월 뒤의 기록인 음력 6월 21일자(양력 7월 22일자) <현종실록>은 청나라 사신이 안추원을 데리고 의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사람이 50만인지 60만인지 그 이상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 대부분이 안추원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은 확실하다. 안추원 사례는 조선 노동력을 청나라로 강제로 이전시킨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에게 장기간의 고통을 안겨줬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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