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의 비극, 진짜 빌런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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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sar99

[이준목 기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1701)는 조선 19대 국왕 숙종의 두 번째 왕비로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 중전의 자리에 오른 여인’이라는 독특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희빈과 함께, 조선 왕실역사에 전례없는 아침드라마급 삼각관계의 주인공같은 삶을 살아야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고 남편의 변덕과 당쟁에 휘말려 한때 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했지만, 불과 34세의 나이에 요절하기까지, 그녀의 짧지만 기구했던 인생은 풍운의 연속이었다.

11월 15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82회에서는 ‘전무후무, 중전에 두 번 오른 여인, 인현왕후는 어떻게 장희빈을 내쫓고 다시 중전이 됐나’편을 통하여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한 장면.
ⓒ tvN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년) 한성부 반송동 사저에서 여흥 민씨 가문의 아버지 민유중과 아내 송씨 사이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1680년 숙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려 19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이듬해 숙종은 두 번째 왕비로 인현왕후를 맞이하게 된다. 인현왕후는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였으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숙종 초기 조선의 주요 붕당은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 세력의 주축이었다. 숙종은 비대해진 남인의 권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서인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것을 선택이었고 서인 집안 출신인 인현왕후의 간택도 이러한 정치적 고려속에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하지만 인현왕후의 혼인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당시 숙종의 마음 속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장희빈이었다. 궁녀 출신이었던 장희빈은 숙종보다 연상이었으나 아름다운 용모와 교태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승은(왕과 동침하는 것)까지 입었다.

하지만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명성왕후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의 아들 숙종이 혹시 장희빈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하여 그녀를 궁밖으로 쫓아냈다. 숙종은 이별 후에도 장희빈을 잊지못하고 그녀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인현왕후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지 3년이 된 1684년, 인현왕후는 뜻밖에도 장희빈을 다시 궁궐에 들일 것을 숙종에게 먼저 제안한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민가에 방치하는 것이 미안한 일”이라며 ‘왕실의 체면’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해 1월 대비 명성왕후가 사망하면서 왕실에는 장희빈을 반대할만한 인물도 더 이상 없는 상태였다. 학자들은 이미 장희빈을 그리워하는 숙종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던 인현왕후가 차라리 숙종의 편을 들어주면 부부관계가 나아지지않을까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인현왕후의 배려로 장희빈은 4년 만에 다시 궁궐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인현왕후의 호의는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사랑에 푹 빠진 숙종은 오직 장희빈의 처소만을 찾았고 인현왕후에게는 더욱 무관심해졌다. 더구나 장희빈은 남인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인현왕후의 가문인 서인 세력과는 정적 관계였다. 남인 세력에게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일종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장희빈은 인현왕후의 면전에서 매일 자신의 처소만 찾는 숙종 때문에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가 하면, 인현왕후의 부름을 대놓고 무시하는 등 방자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인현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장희빈에게 회초리를 때리는 벌을 내리며 기강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희빈의 안하무인은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기 위하여 숙종에 권하여 새로운 후궁인 영빈 김씨를 들이게 한다. 당시 숙종은 아직 후사가 없었고, 남인 세력을 등에 업은 장희빈,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와 영빈중 누가 먼저 아들을 낳느냐에 따라 향후 정계의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1688년 10월 27일(음력), 그토록 고대하던 숙종의 첫 아들이 출생한다. 훗날에 조선 20대 국왕이 되는 경종 이윤이다. 왕자의 생모는 장희빈이었다. 기쁨에 겨웠던 숙종은 당시 소의였던 장희빈을 후궁중 가장 품계가 높은 정1품 빈에 봉하니, 이는 곧 중전 인현왕후의 다음 가는 높은 서열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숙종은 아들이 태어난지 불과 3개월만에 그를 원자에 책봉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는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것이다. 조선 왕실의 예법상, 원자는 오직 정비인 중전이 낳은 적장자만 가능했고, 인현왕후는 아직 후사는 없었지만 나이가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조정은 일제히 충격에 휩싸였고 집권세력인 서인들은 숙종의 결정에 일제 반대했다.

이에 숙종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일으켜 전격적으로 서인 세력을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당시 서인 세력의 거두이자 원로대신인 송시열은 숙종의 결정에 상소를 올려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되었고 제주도도 유배보냈다가 결국 사사 당했다. 이로서 지지세력마저 잃어버린 인현왕후는 더욱 사면초가에 몰리게 됐다.

그해 4월 23일, 설상가상으로 생일을 맞이했던 인현왕후에게 치명타가 되는 ‘탄일문안’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는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할머니인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국상 기간이라 숙종은 어명을 내려서 인현왕후의 생일과 관계된 일체의 행사나 문안을 금지하게 했다.

그런데 인현왕후는 이를 어기고 친정에서 보내온 음식을 받았다. 숙종은 이를 알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자신의 생일날, 남편의 치졸하고 매몰찬 행동에 서러운 눈물만 흘려야했다.

인현왕후의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어명을 어긴 것이었지만 사실 전후사정을 보자면 가볍게 넘어갈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애초에 숙종이 인현왕후의 탄일문안을 금지시킨 것 자체가 무리한 결정이었고 이미 폐출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꼬투리 잡기에 불과했다는 게 사가들의 해석이다.

숙종은 드라마등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한동안 장희빈의 치마폭에 놀아난 우유부단한 군주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조선 역대 군주중 손꼽힐만한 굉장한 다혈질에 고집이 세고 충동적인 성격이었다. 숙종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잔인하고 집요한 일면이 강했고, 효종의 직계후손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당시 숙종이 ‘투기(질투)를 했다’라는 죄목으로 인현왕후를 폐출하려하자, 당시 집권세력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파인 남인마저도 일제히 반대했을 정도로 명분이 없고 무리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숙종은 오로지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현왕후 폐출을 밀어붙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해 5월 2일, 숙종은 결국 인현왕후를 중전에서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궁궐에서 쫓아냈다. 중전의 자리에 책봉된지 8년만이자 정확히 입궁한 날짜와 같은 날에 궁궐을 떠나게 된 순간이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이미 탄일문안 사건으로 숙종의 혹독한 질타를 받자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면 폐출시키라 하였다”고 한다. 남편이 마음의 떠났음을 깨닫고 스스로 폐위시켜달라고 할만큼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인현왕후의 감정이 느껴진다. 숙종의 치졸한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않으며, 궁궐 내에서 인현왕후와 관계된 모든 문서와 물건들을 불태워 흔적조차 남지않게 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이듬해인 1690년, 숙종은 비어있던 중전의 자리에 장희빈을 책봉한다. 장희빈의 아들은 세자가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었을 인현왕후의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사가로 쫓겨간 인현왕후는 이미 친정 가문마저 몰락한 상태로 식량이나 땔감도 부족할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누구의 도움으로 받지않으려고 했다. 그래도 한때 일국의 왕비였지만 인현왕후의 처소는 관리가 되지않아 집은 낡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할 정도였다고 한다. 신하들이 인현왕후에게 옷과 양식을 지원해줄 것을 건의했으나 숙종은 이마저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인현왕후가 페위된지 어느덧 6년이 흐른 1694년 3월, 서인 세력이 비밀리에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가 남인 세력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남인들은 이를 숙종에게 고발하여 처벌을 요구했고, 서인 세력에 대한 국문이 진행된다.

그런데 고발 6일만에 돌연 숙종이 오히려 화살을 돌려 서인을 국문하던 남인 세력을 일거에 축출하는 반전이 벌어진다. 이로 인하여 삼정승을 포함하여 파직당한 인물만 54명, 사형이 14명, 유배가 67명에 이르렀다. 남인 세력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집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5년전의 기사환국과 그 방향만 정반대로 달라졌을뿐, 갑작스러운 정권교체이자 사실상의 ‘보복성 숙청’이라는 성격은 동일했다.

당시 숙종은 남인 정권의 무능에 실망한 데다 장희빈에 대한 사랑도 식어가고 있었다. 숙종은 인현왕후 복위 운동에 대한 남인의 고발이 무리한 수사라는 이유를 내세워 남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정치적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숙종은 갑술환국 1년전, 궁녀 출신의 숙빈 최씨라는 새로운 여성에게 반해있던 상태였다. 숙종과 숙빈 사이에는 인현왕후라는 뜻밖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숙빈은 궁녀로 일하면서 아랫사람에게 따뜻했던 인현왕후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어느날 숙빈은 궁궐내에서 금기시되던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몰래 차려서 기리고 있다가 숙종에게 들켰다. 자칫 큰 벌을 내릴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숙종은 숙빈을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따뜻한 성품에 감동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숙종이 인현왕후에 대하여 은근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작용했다. 숙빈은 숙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어느새 장희빈을 밀어내고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기에 이른다.

갑술환국이 일어나고 2개월 후인 1694년 4월, 숙종은 인현왕후의 거처를 창덕궁 별궁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며 직접 자필편지까지 보내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숙종은 “처음에는 권간에게 조롱당하여 잘못 처분하였으나, 그립고 답답함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깊어져 때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오”라고 의미심장한 고백을 늘어놓았다.

실제로는 인현왕후의 폐출이 오로지 자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음에도 ‘간신들에게 속은 탓’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어쨌든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이는 숙종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치세력을 교체하면서 다시 장희빈을 내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는 정치적 후속조치의 일환이기도 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편지에 답장하며 두 차례나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인현왕후로서는 변덕스러운 숙종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만큼 바뀐 태도에도 곧바로 그 진심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 편지를 보내 간곡하게 진심을 전했고 인현왕후도 더 이상은 거절하지 못했다.

1694년 4월 12일, 인현왕후는 숙종이 보내준 가마를 타고 궁에서 쫓겨난지 6년만에 사가를 떠나 다시 궁궐로 돌아온다. 숙종은 친히 마중을 나가 인현왕후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달후인 6월에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책봉한다. 폐위된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다.

숙종은 재회한 이후 이전과는 달리 인현왕후를 아끼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시기와 질투가 많은 장희빈에 시달렸던 숙종은 성품이 온화하고 후덕했던 인현왕후의 진면목을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

하지만 궁으로 돌아온 인현왕후의 삶은 여전히 평안하지 못했다. 장희빈은 비록 숙종의 총애는 잃었지만 세자의 친모라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지위를 등에 업고 여전히 건재했다.

장희빈은 자신의 측근 궁녀들을 수시로 중궁전으로 보내 인현왕후의 동태를 항시 염탐하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 중전으로 복위되었어도 인현왕후의 궁궐 내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 궁궐내에서의 암투에 질려있던 데다 사가에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있던 인현왕후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정작 인현왕후는 이런 사실을 숙종에게 알리지않았고, 숙종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병세가 악화된 인현왕후는 병문안을 온 숙종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영빈김씨를 중전으로 맞이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고나서 포악한 장희빈이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병을 앓은지 약 1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이는 불과 34세였다. 한의학 논문에 따르면 인현왕후의 사인은 오늘날로 치면 ‘답답함’과 ‘우울증’으로 진딘된다. 궁궐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녀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사실 인현왕후의 삶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 진짜 원흉은 장희빈이 아니라 바로 남편 숙종이었다. 일국의 왕비였음에도 숙종이 주도한 정쟁에 이리저리 휘말려 온갖 수난만 겪어야했던 한 여인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인현왕후 사후, 장희빈의 운명도 나락으로 치닫는다. 장희빈은 궁궐내에 신당까지 차려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드러나 숙종의 분노를 샀다. 숙종은 한때 사랑했던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령한다. 장희빈이 악녀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인현왕후의 비극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장희빈의 탓으로 전가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사건을 거울삼아 향후 자신의 후대 임금들에게는 ‘절대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수 없게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것은 어쩌면 숙종 자신의 잘못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인현왕후에 대한 뒤늦은 죄책감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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