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지망생이었던 그,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선물

Photo of author

By quasar99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김태훈 기자]

 <김현철 Vol.1> 앨범 커버 이미지
ⓒ 케이앤씨뮤직
 
다양한 장르의 대두로 국내 음악의 황금기나 다름없었던 1980년대의 끝자락 어느 겨울,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즐기면서 취미로 음악을 하던 의대 지망생이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조동익, 기타리스트 이병우로 이루어진 포크 듀오 어떤 날의 공연을 본 후, 귀갓길의 압구정역에서 조동익을 마주치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팬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저 김현철인데요. 팬입니다.”

당황한 조동익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고 떠났다. 이 짧은 만남이 김현철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의대에 낙방하고 전기공학도가 되었지만, 공부는 뒷전인 채 조동익의 집에 자주 놀러가며 점차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그는 조동익의 집에 놓여 있던 악보를 멋대로 손보았다. 그 악보를 본 조동익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러 뮤지션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그는 그 시절 가장 잘나갔던 언더그라운드 음반 기획사, 동아기획과 손을 잡게 되었다. 1989년 8월, 국내 퓨전 재즈계의 걸작 <김현철 Vol. 1>은 그렇게 탄생했다.

스무 살의 풋풋함, 소박한 시선 담아낸 앨범

모든 트랙을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점에 주목이 가지만, 작품의 질을 한껏 높일 수 있었던 데에는 든든한 선배 뮤지션들의 세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타에는 들국화 출신의 손진태와 시인과 촌장의 함춘호, 드럼에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출신의 김희현, 그리고 베이스에는 그의 스승 조동익이 참여했다. 심지어 코러스는 박학기, 윤영로, 그리고 장필순이었다. 그것은 동아기획 자체의 힘이기도 했지만, 많은 선배가 김현철의 음성에서 유재하의 감성을 느끼고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기도 했다.

“나의 머릿결을 스쳐 가는 이 바람이 좋은 걸.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 – 김현철 ‘오랜만에’ 중에서.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오로지 김현철이라는 젊은 신인만의 것으로 다가온다. 베테랑들의 노련함은 피복일 뿐, 중요한 뼈대는 스무 살의 풋풋함, 세상을 보는 소박한 시선과 그로 인한 행복감이다. 첫번째 트랙 ‘오랜만에’의 첫 소절부터 행복의 포근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춘천가는 기차’는 보사노바 리듬의 편안한 진행이 인상적인 최대 히트곡으로, 정말 춘천행 기차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휴식과 설레는 마음이 공존하는 기분이 든다. 첫사랑의 기억이 남아있는 동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동네’,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승인 조동익에 대한 헌사에 가까운 ‘형’까지, 가사와 멜로디 곳곳에 김현철 특유의 젊고 세련된 감각이 녹아 있다.

김현철의 등장은 국내 대중음악이 갑작스레 받은 선물이었다. 너무나도 젊고, 재능이 탁월하며, 확고한 자신만의 색깔과 강단이 있었던 뮤지션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90년 5월, 귀갓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뇌경색으로 무려 2년간의 공백기를 가졌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1집 앨범 작업이 그랬듯,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응원으로 힘을 얻은 그는 2집 < 32°C 여름 >을 발매하며 복귀했다. 영화 <그대 안의 블루> OST와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의 3번 트랙 ‘달의 몰락’이 크게 성공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김현철을 다시 음악의 길로 끌어들인 세대
 
 가수 김현철(자료사진, 2019.11.20).
ⓒ 연합뉴스
 
2006년, 9집 <결혼도 못 하고>를 끝으로 그는 어느 순간부터 뮤지션보다는 방송인, 라디오 DJ로서 더 많은 활동을 했다. 더 이상 음악이 재미없다고 느껴졌던 그의 기나긴 음악적 슬럼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를 다시 음악의 길로 끌어당긴 것은 기성세대가 아닌, 그의 활동기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였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티 팝의 유행이 도래하면서 레트로 질감의 국내 음악을 디깅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현철의 음악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김현철은 최근 음악 활동을 재개하며 10집 <돛>과 11집 < City Breeze & Love Song >을 발매, 여전한 감각을 드러냈다.

그 시절의 퓨전 재즈가 그랬듯, 지금의 시티 팝을 필두로 한 레트로 유행도 언젠가는 변하고 다시 저물 것이다. 그러나 유행이라는 것은 항상 돌고 돌기 마련이며, 굳이 당장의 유행이 아니더라도 좋은 음악은 항상 제자리에 남아 있다. 김현철의 음악이 그렇다.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좋은 음악이 유행과 맞물리면서 더욱 회자되는 것일 뿐, 그의 음악이 가진 소중한 가치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