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난함의 대명사’ 스위스가 포기하지 않았던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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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sar99

2016년 12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스위스 근위대와 악수하고 있다. ⓒAP Photo

이번 주는 중세의 스위스로 가보자. 당시 스위스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총독을 파견한다. 총독 게슬러는 광장에 자기 모자를 걸어두고 경의를 표하라 명령하지. 스위스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함이었어. ‘빌헬름 텔’은 이 포고를 어긴다. 그 결과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두고 석궁 쏘기를 강요받지. 다행히 텔의 화살은 사과에 적중했지만, 이후 빌헬름 텔은 게슬러를 죽여 폭정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에기디우스 추디라는 스위스 역사가가 1570년에 쓴 창작물이야. 괴테는 스위스 여행 중 추디의 이야기를 접하고 희곡에 적합한 소재라고 여겨 그 아이디어를 친구인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주었다. 실러는 이를 바탕으로 희곡 〈빌헬름 텔〉을 쓰게 되지.

비록 허구의 소산이라지만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스위스 역사의 서막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어. 실러의 희곡 속에서 게슬러 총독은 이렇게 말하지. “이 조그만 민족 (···) 여전히 마음대로 혓바닥을 놀리고,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있는 민족.” 그 민족은 끝끝내 합스부르크의 압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지켜낸다.

알다시피 스위스는 험준한 알프스산맥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알프스 남과 북을 잇는 교역로를 중심으로 도시와 주(州)들이 산재했어. “민주적 의회를 갖춘 마을은 관리를 직접 선출했고, 알라마니족이나 부르고뉴인들의 고대 게르만 법률로 자신들을 통치”했다고 하지(〈문명 이야기 4-2〉, 월 듀런트 지음). 이런 전통을 지닌 스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직할령으로서 봉건 영주들의 착취에서 자유로운 편이었어. 그러나 13세기 후반 상황이 급변한다. 스위스 북부의 일개 백작령 주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공위 시대(The Great Interregnum)’의 혼란기를 틈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차지했고, 텃밭이라 할 스위스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려 든 거야.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1세가 1291년 7월 사망한 직후 스위스 산악 지역에 위치한 3개 주, 우리(Uri)·슈비츠·운터발덴의 지도자들이 ‘뤼틀리’라는 곳에 모여 동맹을 결성한다. 이 선언의 첫 번째 조항을 보자. “우리·슈비츠·운터발덴 사람들은 그 공동체 안팎에서 폭력이나 불의를 자행하는 세력에 대항하여 서로 간의 원조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로 한다.” 오늘날 스위스는 ‘뤼틀리 선언’이 이뤄진 1291년 8월1일을 스위스의 독립기념일로 자축하고 있어. 실러의 희곡에서 이 장면은 이렇게 묘사된다. “약자들도 단결하면 강해집니다. (…) 폭군의 권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억압받는 자가 어디서도 권리를 찾을 수 없다면 짊어진 짐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면 (…) 어떤 다른 방도도 소용이 없을 때 인간은 마지막 수단으로 칼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기에 생쥐가 사자의 코털을 뽑는 일이 벌어졌다. 슈비츠주의 군대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인 아인지델른 수도원을 약탈한 거야.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공작은 오스트리아 지역의 기사단과 군대를 이끌고 스위스로 진격해 들어간다. 철갑 기사단만 해도 2000명이 넘고 총 병력은 1만명에 가까운 대군. 이에 맞선 스위스 동맹군은 고작 2000명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기세등등했어. 갑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아장거리는 스위스 보병쯤은 단번에 밟아버릴 기세였지. 그러나 왼쪽은 산, 오른쪽은 호수인 외길로 합스부르크 군을 끌어들인 스위스 동맹군은 미늘창을 고슴도치처럼 세운 장창 보병대로 합스부르크 기병대를 상대한다. 산에 숨어 있던 복병들은 돌을 굴리고 나무를 던져 합스부르크 군대의 허리를 찔렀어. 합스부르크 군대는 중무장한 기병이 몸을 내던져 충격을 주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는데 특유의 ‘충돌 전술’이 막혀버린 거야.

스위스 용병들은 왜 달랐을까

철갑 기사단이 먼저 궤멸했고 그 뒤를 합스부르크 보병들의 시산혈해가 따라붙었다. 이것이 “중세(유럽)에서 가장 잔혹한 전투로 꼽히는” 모르가르텐 전투야. “스위스 보병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 도끼 창으로 베고 타격하여 투구를 쪼개면서 오스트리아 공국 기사들을 절반 가까이 죽였다(〈전쟁의 재발견〉 마이클 스티븐슨 지음).” 스위스의 승리가 단순히 지형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어. 황제의 명령 이외에는 싸울 이유가 없었던 합스부르크 군대와 달리 스위스 동맹군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지면 자유와 집, 가축, 여자와 아이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될 것이 뻔했다(〈귀향〉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오늘날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이지만 스위스는 유럽에서 수백 년 동안 가난함의 대명사로 꼽히던 나라였다. 알프스산맥의 첩첩산중에 자리 잡아 농사나 장사로 한몫 보기도 무망한 처지였던 스위스에서 ‘용병’이 특산품(?)으로 떠오른다. 불가사의한 전투력으로 휘황찬란한 기사들을 압도하는 스위스 농민병을 주변국들이 눈여겨보고 군대로 끌어 쓴 결과지.

1527년 최절정기에 이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군대를 일으켜 비위를 거스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응징하고자 로마로 진격한다. 교황을 호위하던 스위스 근위대는 로마 방어전에서 수백 명을 잃고 189명이 겨우 살아남았다.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용병들에게 살길을 찾으라고 했지만 스위스 용병대는 계약과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며 구름처럼 몰려드는 신성로마제국 군대에 맞선다. 그 와중에 147명이 더 쓰러졌지만 42명은 끝내 교황을 모시고 지하통로로 탈출, 교황을 최후의 피난처인 산탄젤로 성까지 옮기는 데 성공했지.

그러나 “로마의 지금 모습은 지옥에서도 볼 수 없을 것(당시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이라 할 정도로 초토화되는 로마 앞에서 클레멘스 7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막대한 보상금과 함께 로마 교황 근위대를 독일 용병으로 바꾸라고 강요했어. 클레멘스 7세는 이를 수용했지만 다음 교황 바오로 3세는 곧바로 스위스 근위병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이 전통은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지.

칼을 맞대고 싸우던 적이라도 돈만 더 준다면 그쪽 편으로 둔갑하기 십상이었고, 전세가 불리해지면 즉시 살길을 찾아 나서는 데 익숙했던 다른 나라의 용병들과 스위스 용병들은 왜 달랐을까. 스위스 용병들에게 신의란 곧 스위스라는 모국의 국가적 신용도 그 자체였기 때문이야. 스위스 최대의 수출품인 ‘용병’의 품질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되었고, 용병 수입은 곧 스위스 본국의 생존 그리고 독립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말이야.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다가 튈르리 궁전에서 죽어간 스위스 용병의 호주머니에서는 이런 유서가 나왔다. “우리가 신의를 저버린다면 우리 후손들이 직업을 잃을 것이다.” 스위스는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에 걸맞은 역사를 지녔다고 할 거야. 그 ‘매운맛’의 원천은 어떤 압제도 자신들을 굴복시킬 수 없으며, 돈을 받고 싸울지언정 한 치의 비겁이나 불신의 여지를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자존감이었다. 작고 약할지라도 스위스인들이 끝끝내 지킨 ‘자존감’ 말이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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