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목 기자]
윤심덕(尹心德, 1897-1926)은 한국 1세대 여성 성악가이자 소프라노로서, 그녀의 대표곡 ‘사의 찬미’가 수록된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10만 장 이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입지전적인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윤심덕은,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바다 한복판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수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11월 1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80회에서는 ‘조선 최고의 가수 윤심덕은 왜 현해탄에 몸을 던졌나’ 편을 통하여 한국 대중음악의 선구자였던 윤심덕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남 3녀중 둘째였던 윤심덕은 또래에 비하여 키가 컸고 목소리가 우렁차서 골목대장 노릇을 할만큼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윤심덕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부모의 영향으로 윤심덕은 당시 보통 여성들과는 달리 남녀차별 없이 평등한 대우와 신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윤심덕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 성가대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노래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이 당시 윤심덕은 교회 선교사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서양 음악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tvN 스토리 역사 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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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의 길 택한 윤심덕
하지만 윤심덕은 가난한 집안형편과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하는 사정을 고려하여 음악 대신 안정적으로 돈을 벌수 있는 의사가 되려고 했다. 윤심덕은 의대 진학을 위하여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 음악에 대한 열망을 숨길 수 없었다. 결국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성악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윤심덕은 본래 서양 성악의 주류인 이탈리아 유학을 꿈꿨지만 현실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일본 유학을 대안으로 결정했다.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시험을 거쳐 유학 자금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당시 일본 유학생중 여성의 비율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윤심덕은 성악을 배우기 위한 일본에 유학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1915년 4월, 18세의 윤심덕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최고예술대학으로 꼽히는 도쿄 음악학교 입학을 위하여 유학길에 오른다. 성악 전공으로는 유일무이한 조선인 유학생이었던 윤심덕은 일본에서도 남다른 실력과 친화력으로 빠르게 적응했고 현지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일본 유학 6년만인 1921년, 조선인 유학생들이 만든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가 기획한 조선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한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민중들을 음악과 공연으로 위로해주는 취지에 윤심덕은 흔쾌히 제안은 수락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윤심덕은 당시 조선 순회공연의 연출자이자 훗날 운명적 인연이 되는 극작가 김우진(1897-1926)을 만나게 된다.
조선 순회 공연은 윤심덕에게 있어서 대중 가수로서의 인생 첫 공식 무대이기도 했다.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고, 그중에서도 단연 관객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은 윤심덕의 노래였다. ‘신민’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그녀의 독특한 미성으로 성악에 도취되게 하였으니 그때부터 일반이 비로소 윤심덕의 성악가로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심덕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 서양식 성악이라는 생소한 장르의 조합은 그만큼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처럼 조선 순회 공연은 당시만 해도 아직 조선에서는 생소했던 서양음악을 알리고 성악가 윤심덕의 존재까지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또한 민중들을 대상으로 계몽을 위한 순회 강연 정도가 고작이었던 조선 문화계에서 ‘연극과 음악을 결합시킨 공연’은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파격적인 시도로 더욱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순회공연은 1921년 8월 18일까지 전국 25개 도시를 돌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순회공연의 히로인으로 부상한 윤심덕은 도쿄로 돌아온 이후에도 높은 인기와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윤심덕을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윤심덕을 짝사랑하던 한 조선인 남학생이 상사병에 걸려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건이 발생한 것. 오늘날로 치면 유명인에게 집착하는 극성팬의 모습이다. 윤심덕의 잘못은 없지만 팬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윤심덕에게도 충격적인 트라우마가 될만한 사건이었다.
힘들어하는 윤심덕의 곁에서 고민을 묵묵히 들어주고 위로한 것은 김우진이었다. 그는 목포의 한 부잣집 가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집안이 정해준대로 일찍 결혼하고 유학길에 오른 유부남이었다. 윤심덕은 김우진 덕분에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성악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후 윤심덕과 김우진은 편하게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소울메이트 사이가 됐다.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한 윤심덕은 당시 도쿄 유명 극장으로부터 전속 여배우 제안을 받았지만 성악가의 꿈을 위하여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윤심덕은 성악을 더 배우기 위하여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이탈리아 유학을 다시 추진했지만, 이번에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했다.
결국 윤심덕은 고국으로 돌아와 1923년 6월 26일, 경성의 종로중앙청년회관에서 본격적인 ‘성악가 윤심덕’으로 첫 데뷔무대를 가지게 된다. 조선인에게 생소했던 성악 공연임에도 윤심덕의 출연만으로 공연은 연일 매진이었다. 당시 잡지 <신여성>에서는 ‘윤심덕! 이 이름은 실로 여왕의 기세를 떨치는 이름이다’라고 극찬을 아까지 않으며 윤심덕 열풍을 조명했다. 윤심덕은 조선 1세대 소프라노로 자리잡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조선의 슈퍼스타가 되었음에도 윤심덕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치솟한 인기와 명성과는 별개로 윤심덕이 받는 급여는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당시의 대중문화 시장에서는 성악 공연으로는 교통비 정도의 보수밖에 받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 윤심덕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녀가 많은 돈을 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온 가족이 경성으로 찾아와 앞으로 가족을 부양할 것을 요구했다. 졸지에 윤심덕은 4명의 가족까지 부양해야하는 생계형 가수가 되어버렸다. 윤심덕은 돈을 벌기 위하여 시간강사부터 개인 교수까지 밤낮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본인이 꿈꿔왔던 미래와는 전혀 다른 현실은 윤심덕을 좌절하게 했다.
윤심덕이 답답한 마음을 위로받을수 있었던 유일한 쉼터는 김우진이었다. 당시 김우진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고향 목포에서 지내고 있었다. 윤심덕은 경성에서 무려 26시간 거리에 있는 목포를 찾아가 김우진과 재회했다. 김우진 역시 애정없는 결혼생활과 극작가의 길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다가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1920년대의 청춘들은 이른바 ‘모던보이’ ‘모던걸(현대의 신세대)’이라고 불리며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모가 짝지어주는 강제 결혼보다 자유연애(설사 불륜이라도)를 더 도덕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는 점에서 기성세대나 보수적인 사회관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1924년, 27세의 윤심덕은 경성의 재력가였던 김홍기라는 인물과 결혼설에 휩싸였다. 당시 기준으로 윤심덕의 나이는 이미 혼기를 꽉 채운 연령대였고, 김홍기와의 만남은 윤심덕 부모님의 성화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김우진을 마음에 두고 있던 윤심덕은 혼담을 끝내 거절한다.
그해 11월, 윤심덕은 경성 방송국의 라디오에서 DJ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윤심덕의 인기 덕분에 라디오는 큰 화제가 됐고, 윤심덕은 방송에서는 정통 성악보다 대중에게 좀 더 친근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윤심덕은 음반을 제작하여 판매하여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심덕은 혼인스캔들에 이어 또다시 악성 루머에 휘말리게 된다. 윤심덕은 성악을 공부하던 동생의 미국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당시 경성의 재력가였던 이용문이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았다.
칩거, 그리고 재기, 대중의 혹평
그런데 몇 달후 ‘윤심덕이 돈을 받고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괴소문이 경성에 일파만파로 커졌다. 확인되 지않은 루머들로 윤심덕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빗발치는 비난을 견디지못한 윤심덕은 결국 모든 활동을 접고 안동으로 내려가 칩거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윤심덕은 약 1년뒤 다시 돌아와 재기를 노렸지만 대중의 오해는 아직 풀리지 않았고, 결국 복귀 공연은 크게 실패하고 만다. 더 이상 소프라노로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윤심덕은 고심 끝에 당시로서는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지던 배우로서의 전향을 모색했지만, 이마저도 대중의 혹평 속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공백기부터 재기까지 묵묵히 윤심덕의 곁을 지켜준 유일한 인물은 연인 김우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선정적으로 기사화하는 기자들 때문에 매일같이 시달려야 했다.
윤심덕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생계를 위하여 방송국 출연과 일본의 레코드사와 음반 계약을 맺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미 벼랑 끝에 몰려있던 윤심덕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전속 촉탁가수’로 활동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 것.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윤심덕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이용하려 했고, 총독부장학생으로 음악공부를 했으니 이제 보답을 해야한다는 논리로 윤심덕을 압박했다. 총독부의 전속가수가 된다는 의미는, 일제관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생 취급을 받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 충격을 받은 윤심덕은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위태위태한 삶의 무게가 절절히 느껴지는 이 가사는 윤심덕이 직접 작사한 내용이기도 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꿈을 좇을수록 역설적으로 현실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허망함이 윤심덕의 마음을 짓눌렀음을 짐작게 한다.
윤심덕은 일본에서 김우진과 재회하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온지 한 달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1926년 8월 3일, 두 사람은 조선으로 귀국하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5시간 정도 흐른 8월 4일 새벽, 윤심덕과 김우진은 배위에서 돌연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목격자도 유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바다에 뛰어든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이 사건을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목숨을 끊는 것)’라고 보도했다. ‘양장을 한 여자와 중년 신사가 서로 몸을 껴안고 갑판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이다. 이후로도 믿기 어려운 두 사람의 미스터리한 실종을 둘러싸고 ‘생존설’ ‘살해설’ 등 다양한 의혹과 추측이 쏟아졌지만 끝내 진실은 밝혀지 않았다.
당시 윤심덕과 김우진은 모두 벼랑 끝에 몰려있던 상황이었다. 윤심덕은 일본으로 건너올 때 자신의 운명을 이미 직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도 희망없는 암울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자존감이 강했던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삶의 허망함이 묻어나는 <사의 찬미>는 어쩌면 윤심덕이 유서를 대신하여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윤심덕 사후 2주후에 발매된 <사의 찬미> 유작 음반은 10만장이라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판매를 올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윤심덕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음악은 전설이 되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자 조선 최고의 연예인이었던 윤심덕이 만일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꿈을 펼쳐나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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